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고립된 인간상은 종종 영화에서 실감나게 재현된다. 인간 사이의 정서적 단절과 기술 또는 사회 구조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들은, 때로는 그 고통을 감추고 살아가며, 때로는 감정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스파이크 존즈의 허 (Her, 2013)와 폴 베르호벤의 엘르 (Elle, 2016)는 장르와 배경은 다르지만,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감정 단절과 소외를 주제로 다룬 수작이다. 이 두 작품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이라 부르며,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되묻는다.
허 (Her, 2013) - 인공지능과의 사랑, 인간 고립의 미래
허는 가까운 미래,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 남성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테오도르는 이혼 후 깊은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며, 감정을 털어놓을 상대가 사라진 일상에 익숙해진 채 살아간다. 그러다 그는 자가 학습이 가능한 OS 운영체제 ‘사만다’를 구입하고, 점차 이 인공지능과의 교감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사만다와 현실 세계의 인간관계보다 더 깊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 영화는 단순히 'AI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테오도르는 실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었고, 그로 인해 점점 현실을 회피하고 편리한 감정 교류로 대체해버린다.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그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그의 언어와 감정에 반응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타인과의 갈등이나 감정 소모를 감내하지 않고도 '사랑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과장되지 않은 미래상을 통해 현재의 인간관계를 투영한다. 잔잔한 색채, 부드러운 조명, 그리고 도시의 고요함 속에서 테오도르의 외로움은 더욱 도드라진다. 사만다가 인간보다 더 감정적이고 섬세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설정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세계를 상징한다. 이 영화는 질문한다. ‘우리는 진짜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의 환상을 통해 고독을 견디고 있는가?’ 테오도르의 관계가 종말을 맞이한 이후에도 관객의 마음에 남는 것은, 사랑의 본질보다는 인간의 고립된 존재성이다.
엘르 (Elle, 2016) - 폭력과 침묵 속 감정의 마비
엘르는 중년 여성 미셸이 자신의 집에서 폭행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피해자 중심의 피해 회복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영화속에서 미셸은 범인을 찾기 위한 어떤 절박함도 보이지 않는다. 미셀은 일상생활을 계속 유지하며 오히려 냉정하고 계산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영화는 이 독특한 인물의 태도를 통해서 고통과 트라우마가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단절시키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 감정의 단절이라는 것이 하나의 생존수단이라는 것도 보여준다. 미셸의 아버지는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리고 미셀은 그 사건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살아가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주도권을 쥐기위해 노력한다. 그녀의 냉철함과 비현실적인 대응 방식은 감정이 아예 사라진 사람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그 지점이다. 미셀은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를 특정방식으로 관리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사회적 도덕이나 공감의 영역이 아니기에 관객들은 당황스럽다. 폴 베르호벤은 이 영화에서 매우 도발적인 연출을 구사한다. 절제된 카메라 워크를 사용하며 인물의 내면보다는 외형적인 선택과 행동에 초점을 둔다. 관객은 미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고, 그녀의 대응을 따라가며 끊임없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결국 감정 단절이라는 주제를 관객 스스로 체험하게 만든다. 엘르는 단순히 여성의 생존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극단적인 고립속에서 어떻게 감정을 도려내며 살아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후기- 감정 단절이라는 현대적 병리의 두 얼굴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인물과 설정을 갖고 있지만, ‘감정 단절’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이야기한다. 허의 테오도르는 감정을 나누는 대상을 찾지 못해 스스로 인공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반면 엘르의 미셸은 관계의 파괴와 폭력을 통해 감정을 스스로 차단하며 살아간다. 하나는 기술적 소외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폭력으로 인한 감정의 단절이다. 허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장센으로 외로움을 말한다면, 엘르는 차갑고 날카로운 현실 속에서 감정의 부재를 보여준다. 전자는 정서적 교감에 대한 환상, 후자는 감정조차 거래 가능한 냉혹한 생존 전략을 말한다. 공통점은 명확하다. 두 인물 모두 감정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감정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이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모순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이 두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과연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인간은 언제부터 감정의 고통을 회피하는 존재가 되었는가? 허와 엘르는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결국 ‘감정이 사라진 시대의 인간’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그 속에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Her》시간이 지날수록 깊이 스며드는 영화다. 테오도르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처음엔 허구처럼 느껴졌지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스마트폰에 말하듯 이야기하고, SNS로 감정을 나누는 요즘의 일상에서 감정은 점점 '기술'에 기대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Her》는 SF 장르에 머물지 않고, 외로운 현대인의 감정 구조를 아주 현실적으로 담아낸 영화다.
테오도르라는 인물은 사랑을 잃고, 관계에 지쳤으며, 타인과의 연결에 상처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사만다’는 이상적인 연인이 된다. 감정은 진짜처럼 느껴지는데,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 맺는 관계가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질문은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감정을 기술로 위로받은 경험이 있기에, 테오도르의 감정선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공감되고 아팠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것은 ‘이별’ 장면이다. 사만다가 모든 AI들과 함께 떠나는 순간,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홀로 남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누군가를 이해하고, 상실을 받아들이며 성장한 상태다. 기술적 관계라도 진심을 다했다면, 그것 역시 인간의 감정이었던 거다. 이 영화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외롭고 복잡한지를 담담하지만 치열하게 들여다본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연결’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내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Elle》를 처음 봤을 땐, 영화가 전개되는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오프닝부터 주인공 미셸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일반적인 피해자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며 점점 그녀의 삶과 과거가 드러나자, 왜 그녀가 그렇게 반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영화는 고통에 대한 회복이나 분노를 보여주기보다, 감정을 어떻게 ‘차단’하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미셸은 이미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인물이다. 아버지가 연쇄살인범이었던 과거는 그녀를 늘 사회 밖의 존재로 만들었고, 그녀는 그 상황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응해왔다. 강해 보이지만 그 강함은 방어막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내려놓았고, 통제 가능한 세계만을 받아들인다. 나는 미셸을 보며,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무표정 속엔 오히려 더 복잡하고 격렬한 감정이 숨어 있었다.
《Elle》는 불편한 영화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 덕분에 더 오래 남는다. 고통을 미화하지 않고, 피해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지 않으며, 오히려 능동적으로 현실을 맞서는 인물로 그려낸다. 이 영화는 '트라우마'를 피하거나 회복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관객으로서 나는 미셸의 선택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전달하는 핵심 메시지일 것이다.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고통은 누구나 다르게 처리하는 법이다. 《Elle》는 그 잔혹한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다.